김득구 프로필
출생
1956년 8월 10일
강원도 고성
사망
1982년 11월 1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국적
대한민국
신체
168cm
종목
복싱
전적
20전 17승 2패 1무
대한민국의 전 권투 선수 입니다.
1956년 강원도 고성에서 막내로 태어나 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3번 결혼을 하셨습니다. 원래 이름이 이덕구였지만 어머니가 재혼하시면서 새아버지의 호적에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했습니다.
가난하게 자라났으며, 1972년 이부형제와의 갈등으로 가출하여 서울로 상경합니다. 권투 선수가 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았으며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천호상업전수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세계 타이틀에 도전한 해인 1982년 약혼을 했으나 그 해 비극적인 사고로 인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득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매치 상황은?
레이 맨시니와 김득구의 타이틀전은 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열렸습니다.
김득구는 비장한 각오로죽었을 때 사용하는 관을 한국에 두고 가면서 진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실제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성냥갑으로 모형관을 만들어서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당시 경기상황을 보면 9회까지는 김득구가 맨시니와 호각에 가까운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 10회 때부터 체력 고갈로 난타를 허용하였다. 그 후 11~13회에 걸쳐 계속 수세에 몰리면서도 엄청난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이때 허용한 집중타로 김득구의 눈 주위가 크게 부어오르게 되었습니다.
운명의 14라운드.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지만 김득구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공이 울리자마자 맨시니에게 다시 달려들어 펀치를 섞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점수를 내는데 유효한 타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지칠 대로 지쳐 가드를 완벽하게 올리지 못한 김득구의 왼쪽 머리에 맨시니의 라이트가 강하게 적중했다. 이 라이트 타구에 놀란 김득구가 뒤로 물러났지만 맨시니의 따라붙는 속도가 더 빨랐습니다. 이어지는 맨시니의 왼손 훅은 일단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긴 했으나 후속타가 계속 나올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이미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김득구는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스텝도 넓게 밟지 못해 안면을 그대로 노출했고, 달려들던 맨시니가 뻗은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김득구의 턱에 제대로 적중해 버렸다. 김득구는 이 충격만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다운되고 말았다.
김득구는 필사적으로 로프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키고 결국 다시 일어서기까지 했지만 이미 경기 속행은 어려운 상태였다. 이에 심판이 KO을 선언하며 맨시니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맨시니가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김득구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뇌출혈에 대한 처치와 혈전 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5일 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있었던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마스크를 떼어내고 장기기증을 하면서 향년 26세를 끝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사망 당시 뱃속에 있던 아이는 사망한 다음 해 태어나 치과의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죄책감을 느낀 채 살아가던 맨시니 선수가 미국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고 하네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한 선수의 파란만장한 인생, 글을 마치며
저는 잘 모르지만 부모님 말씀을 들어보니 저 때 당시에 집이 가난하면 인생 역전을 꿈꾸며 운동선수를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해해 줄 수 없는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고,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꿈이 생겨 유명한 선수가 되었지만 그 꿈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20대의 가난한 청년 이야기는 우리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특히나 김득구 선수 사후 가난한 내 탓에 아들이 떠났다며 자책하던 어머니의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지금 행복하게 지내고 계시겠죠?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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